2013년 12월 30일 아침.
전날 마신 커피가 확실히 진하긴 했는지 밤잠을 조금 설쳤지만 그래도 늦잠자도 되는 휴일이니까^^
정말 게스트하우스 조식만 부랴부랴 챙겨먹고 10시경에 방을 나왔다.(체크아웃 시간에 맞춰서 쫓겨났다는 표현이 더 맞겠구나.ㅠㅠ)
마음같아서는 게스트하우스 2층 침대에서 하루종일 뒹굴면서 책이나 뒤적뒤적 게으름 부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자리를 떴고... 딱히 갈 곳은 없다.
멀리 가긴 귀찮은 날이고, 아무것도 안하긴 그래서 근처 카페 열린 곳에서 한가하게 책 읽을 생각으로 한권 챙겨서 나왔는데 이런...최마담네 빵다방도, 뜨레비양도, 꽃피자도 오픈 시간이 아직 한시간이나 남았구나.
뭔가 좀 더 걸으라는 계시 같기도 하고 해서 근처 한림공원으로 향했다.
주위 꼬맹이들이 식물원보다 더 환장하는 동물체험장.ㅎㅎㅎ
전부 가족들뿐이라 롯데월드에 혼자 놀러온 모쏠 같아서 잠시 멈칫;;;
돈이 많아도 어려운 건 어려운 것. 간송미술관도 에디슨참소리박물관도 그런 의미에서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는...
dslr 오글오글 인증샷.

심지어 저거 찍을 때까지만 해도 류선생님이 가르쳐 주시기 전이라서 동영상 촬영도 한번 안해본 심각한 상태였다는......ㅠㅠㅠㅠㅠㅠ
협재굴 안의 신기한 모자상
삼척 살 때 뻔질나게 봤던 삼척굴 대금굴 생각나네...^^ 용암동굴이 우리나라에 많이 없어서 그런지 석회동굴 만큼 신기한 형체는 많지는 않았지만 저 모자상 하나만큼은 사람이 만든 조형작품같다.
71년도 개관 후 매년마다 한 기씩 공원에 갖다놓는 듯하다.

최마담네 빵다방이 열려있기에
여기 주력 메뉴인 듯한 커피와 시나몬롤은 안시키고 얼그레이와 에그타르트를 시키니 후추쿠키가 딸려 나온다. 갓 구운 에그타르트 따끈따끈 바삭하고 쫄깃하고 맛있다.ㅠㅠ 이걸로 세시간 걸어서 고픈 배를 달랠 수 있길.^^
드디어 꺼낸 첫번째 책(이 거의 제대로 읽은 마지막 책이 될 줄은 이땐 몰랐다.ㅠㅠ)
김윤식 대감이 을미사변 후폭풍으로 제주섬으로 귀양가는 첫장면이 무진장 신고스럽다. 송파 나루에 배 띄운 뒤부터 목포에 도착해서 거지꼴이 되어가는 장면하며 겨우 제주행 배를 타고 다도해를 건너 물살 험한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를 면하고 정박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펼쳐진다.
불과 110년 전 일이다. 제아무리 권세 높은 김대감도 제주섬 한번 오려면 거지보다 못한 꼴을 겪었는데 지금 여기는 개나 소나 나같은 인간이나 중국인이나 비행기 한번 뜨면 한 시간만에 오는 만만한 섬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신혼여행 때도 못가본 제주도...나는 답사니 힐링이니 요사스러운 핑계로 포장하면서 나름 호화판 여행을 하고 있으니 나는 행복한 걸까, 아니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걸까.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초반에 비중있게 그려지는 김대감이 아니다. 민당을 일으켜 살길을 도모하는 제주섬 백성들이 처한 가난의 고통이 이 소설의 존재 이유다. 제주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소설을 못 쓰겠지. 제주마와 전복을 진상하기 위해 별별 고초를 겪으며 천혜의 땅이라는 곳에서 천형처럼 살아가는 그 때의 제주 사람들.
지금도 돌아다니다 보면 사실 때깔 좋은 사람들은 외지인일 확률이 더 높은듯...돈 많은 외지인(이제는 중국인까지 가세했다던가...)들이 땅사고 집짓고 제주를 헤집어 놓지만 버스에서 만나는 꼬깃꼬깃한 천원지폐를 들이미는 오일장 가는 할머니와 제주어와 표준어를 능수능란하게 섞어 쓰는 버스 기사 아저씨, 한림읍내 한바퀴 돌며 만난 어묵파는 할아버지, 읍내 유일한 네일샵 안에서 만난 시장 통닭을 맛있게 집어먹던 아줌마 무리는 그런 제주여행 붐으로 돈을 버는 것과는 그닥 관련이 없어 보였다.
제주여행 붐이 계속될지, 아니면 언젠가는 꺼질지 앞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붐을 타고 입도한 나같은 사람이라도 한두번의 제주'관광'으로는 접하기 힘든 진짜 제주를 조금씩은 알아가는 것같아서 갈수록 여행이 재미있어지고 있다.
아무튼 빵다방에서 귀양다리 입도 장면까지 잘 읽고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체크인 시간 조금 넘어서 침대로 다시 들어왔다. 이런 여행 진짜 좋아.ㅠㅠㅠ 학교에서 티타임 한번 없이 쉬는 시간 10분도 시간표 바꾸느라 허덕대던 일상에서 벗어나서 이런 낭만적인 여행자 모드라니.ㅠㅠㅠ
돌아와서 침대에서 잠깐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제는 서른 넘은지 아주 오래된 최영미 시인의 위로를 느끼며 한 시간 동안 스르르 낮꿀잠에 빠져 들었다...
한림공원 나서기 전 오늘 아침, 맞은편 1층 침대에 새침해보이는 룸메 한명이 지도를 펴들고 깨알같이 적고 있었다. 제주도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어떤 날은 혼자서 힐링하고 어떤 날은 친구 차에 얹혀서 여행하는 중이란다. 내가 지도 뒤편을 보니 꼭 직접 그린 것같아서 말을 걸었더니 새침한 표정이 누그러지고 애기같이 웃으면서 책자에 딸려나온 지도에다 메모하는 중이란다.
아침에 가까운 최마담네 빵다방이랑 한림공원이 유명하다고 이야기해줬는데 저녁에 방에서 다시 만났더니 자기도 빵다방 나랑 시간차를 두고 갔다 왔다고 한다.
나랑 두 살 차이, 이틀 후면 서른이 된다는 손지홍.
12월 협재에서 만난 스쳐지나는 소중한 인연.
참고로 안경쓴 이 귀여운 서른살 여자 이고명. 11월 플래닛 게스트하우스 세면대에서 어색하게 인사한 후 모살에서 또 만나서 내가 시킨 수제소시지 안주랑 그녀가 시킨 만두국을 서로 나눠먹고 하룻밤 절친이 된 소녀같은 여자.ㅎㅎㅎ

아무튼 지홍이가 게스트하우스 치맥파티에 오늘은 못갈것 같다기에 나가서 한 잔하자고 한번 떠봤더니 생각외로 시원하게 오케이를 해버린 그녀.
짝짜꿍 맞아서 둘째날 밤 모살로 와서 같이 생맥을 마셨다.
직업은 디자이너. 직장을 연말에 그만두고 새 직장 출근하기 전에 짬을 내서 5박6일간 여행 왔다는데 서른을 목전에 두고 직장과 연애가 모두 마무리가 되는 바람에 무척 마음 심란한 듯했다. 모살에서 결국은 힘들었던 얘기 꺼내다가 지홍이 울었다. 나도 괜히 울컥하고. 손님이 많아져서 자리 이동을 하다가 결국은 어둑한 이곳 연인석에 오니 나도 괜히 감정이입이 돼서 손을 꼭 잡아주고 힘 불어넣어 주고.
그리고 11시에 지홍이 간 다음에는 나혼자 여기서 기네스와 레페로 조금 더 달렸다.
집떠나 처음 맛본 맥주.
지난번 11월에 에릭클랩튼의 'Layla' 좋아한다고 한 번 더 들려달라고 한 걸 귀신같이 기억한(혹시 사장님도 기억 못하고 그냥 좋아서 튼건...?) 사장님이 그 곡을 틀어주었고...난 지홍이랑 울다가 음악듣고 웃다가...협재의 둘째날이 모살에서 그렇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