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의 경주 워크숍에서 돌아오고, 28일 밤을 고등학교 친구들과 상남동 불토로 장식한 후에, 아무리 안 그러고 싶어도 폭주할 수 밖에 없는 연말이라 조금 눈치가 보여서 집에다가 했던 거짓말은,
엄마, 6박 7일로 순천 선암사 템플스테이하러가요
이봐...선암사는 봄에 가서 매화와 산수유 꽃구경 하러 가는게 제일 나을거야. 저 상황에서 템플스테이라는 변명거리를 떠올리는 것도 모자라서 경상도 주민이 쉽게 찾아가지는 않을 선암사라니...이정도면 완전 범죄 되시겠어. 아니 그보다 이제는 독거노인 될 셋방이라도 알아보고 독립하는 게 나을 나이...

이 연말에 남친 버리고(영성씨 미안...) 혼자서 떠나는 건 왜 이다지도 설렐까?
일주일 재충전이 끝난 지금에야 조금은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지만 늦가을 거쳐 초겨울까지 항상 이맘때 제일 찌들어 산다. 봄에는 시작이라 힘들어도 내색하지는 않지만 가을은 익어가는 것보다 곪아가는 것이 더 많은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했다.
11월에는 추사유배지,백조일손묘역,알뜨르비행장,대정향교 등 짧은 주말 안에 대정읍 한 군데를 최대한 걸으면서 답사 모드로 꾸려갔지만 이제는 다 포기. 책만 여덟권이다.
이거 다 읽고 협재에서 명상의 시간을 보내면서 새해 계획을 차근차근 세우자.
노란색 노무현재단 레어템 수첩에다 깨알같이 명상의 기록을 일지로 싹 다 남기고 작년을 반성하는 거다.
사실 뜯어보면 이쁜 구석밖에 없는 우리 애들한테 일 핑계 대면서 꾸준히 못 챙겨줬던 못난 담임으로서도 반성하고, 일에 지친다고 칭얼칭얼대던 직장인으로서도 반성하고, 옆사람들 못챙겨주고 식구들한테도 무심한 못난 딸래미로서도 반성 좀 하고...명상할 게 좀 많은가?ㅠㅠ
(돌아올 때는 일곱권으로 줄었다. 서른을 맞은 게스트하우스 메이트 지홍이를 위해서...^^)
책 옆으로 깨알같이 보이는 첫날 마신 모살 바리스타의 테이크 아웃 드립커피...(케냐AA 였나, 아니면 예가체프였던가...기억이 가물...)
나름대로 제주 테마에 맞춰서 골라온 것들이지만 답사용 힐링용 허세용 찬란한 구색 맞추기.ㅠㅠ결국 싸돌아 다니기 바빠서 드문드문 조금씩만 손댔다.
(하지만 역시 무겁긴 해도 이번에 현기영 소설이자 영화 이재수의 난 원작인 <변방에 우짖는 새>와 유홍준답사기 제주편을 골라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행기는 5시에 출발했지만 공항에서 캐리어 하나 짐가방 하나씩 피난민 모드로 도착해서 제주 구도심을 한바퀴 도는 시내버스를 타고 겨우 서일주 버스로 갈아탄지라 일요일 저녁 8시가 넘어서야 협재리 버스정류장에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다.
'템플스테이' 가는 나를 배려해서 식구들이 오리찜을 늦은 점심으로 먹이고 보낸 것만 믿다가 저녁 식사를 놓치고 털래털래 양손에 두 짐을 힘겹게 들고 걸어가는데 밝게 켜진 협재의 단골 카페 모살의 하얀 조명이 추운 겨울밤 공복의 위를 혹사할 듯한 커피 브레이크를 걸어버렸다.
모살...
캄캄한 8시 겨울 밤에도 지붕은 샛노란 모랫빛으로 빛나는 가게다.
제주 시골동네 지붕은 약속이나 한 듯 파랑 혹은 초록을 고집스럽게 고수한다. 모르는 육지것들에게는 이국적인 그 풍경도 물론 좋지만...
청록지붕들 틈에 끼어있는 노란 지붕은 낮에도 독특하지만 밤에는 이곳 협재 앞바다에서 고려시대에 갑자기 솟았다는 전설 속의 비양도처럼 주변과 독립된 하나의 행성같은 느낌을 준다.

노란 슬레이트 지붕 오른편 기네스 간판에 조명이 하얗게 켜질 때면 난 사실 커피가 아니라 맥주가 미친듯이 고파지기 시작한다.
협재 삼거리 대로변 아늑하게 들어선 이곳의 문턱을 넘기 전 왼편 제주식 돌담을 사뿐히 가분히 깎아 얹어 놓은 불켜진 하얀 직육면체의 간판은 한적한 시골이면서 동시에 전국에서 여름에 가장 핫한 관광지 중 하나라는 협재의 양면성과 묘하게 닮아있다.
주변 건물인 시골 민가와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을 만큼 소박하면서도 갤러리 안에서 고상하게 몇십 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미니멀한 오브제 느낌도 난다.
카페의 내부구조도 마음에 들지만 나는 9월 보름달 뜬 밤에 본 흰 모살 간판에 처음 홀리듯 이 가게로 들어온 것같다. 아 물론 나같은 술쟁이를 알아본 사장님의 호객도 한 몫 했지만...ㅎㅎㅎ
소박하면서도 세련되기는 정말 어렵다. 어설픈 감각으로는 백이면 싹 다 전멸이다. 어쩌면 타고난 자들만이 이걸 가질 수 있을 지도...소박하려고 들면 촌스럽기 쉽고 세련을 원할 때는 오버하기 일쑤다.
전국 어디를 가도 인테리어 으리으리한 커피숍, 술집들이 동네마다 포진한 지루한 시대에 두 남자 사장님들의 안목이 세련된 탓인지 이곳은 시골 출신이라면 익숙한 '동네 할머니 운영하시는 시골 점빵' 건물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정체성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셋째날 같이 모살로 오셔서 차 한잔 하고 가신 해군기지 건축 책임자인 모 선생님 말에 따르면 - 난 전혀 안 보이는 부분이 집 짓는 분들한테는 보이나 보다 - 골조가 옛날식 슈퍼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12월 모살 바로 옆 건물은 가정집은 아닌 듯하고 곧 영업할 것같은 상가 건물 신축공사가 한창이었다.
부수고 새로 지으면서 얻는 도회적 세련됨도 협재에 많아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건 굳이 협재가 아니어도 어디든 때려 부순 다음 똑같이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인공의 느낌이다.
이 가게는 협재의 과거를 말하는 동시에 지금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똑같은 기네스 병맥이라도 작년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창원 단골 재즈클럽의 기네스 생맥보다 더 극적인 맛을 전해주는 가게이다.
어쩌면 그런 부분은 주인의 운영 철학이랑도 맞닿아 있는 걸 수도 있겠다.
해변가 관광지의 세련된 칵테일 바이면서도,
어떤 날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맞은 편 침대 쓰다가 눈 맞은 동성 친구들끼리 급친해져서 생맥 한잔에 수다 떨기에도 안성 맞춤이고(11월 플래닛 식구인 고명이를 모살에서 만났을 때 내가 너무 친한척했던지 지켜보시던 사장님이 작업 걸지말라는 농을 던지기도...),
또 어떤 날에는 동네 주점 투다리를 연상케 하는^^; 지역 주민들의 사람냄새 나는 사랑방 같은 분위기마저 난다.
협재리 할머니 한 분이 수줍게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고 가시는 모습이 일주일 간 이 가게에서 저녁 시간 내내 있으면서 본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그리고 난 여기서 기네스를 서슴없이 까는 대책 없는 여자다.ㅠㅠㅠㅠㅠ
협재리에서 명월리 가는 쪽 삼거리 맛나라는 아담한 식당 길 건너편

한 잔 하기 딱 좋은 초저녁, 카페 모살에 조명이 들어오면 찬바람 맞으며 해변가 산책을 하다가도 왠지 마음이 바빠집니다.
( 비터스윗 블로그 주인장님 죄송...혹시 보고 불쾌하시면 바로 이 사진 삭제들어갑니다. 이 가게에서는 매일 혼자서 맥주를 들이키기 바빠서 지금 와서 보니 전경 사진 제대로 찍어준 게 없구나...

12월, 겨울 모살의 낮시간 생얼. 여기 창가 자리에 앉아서 맞은편 풍경을 바라보면 통유리로 협재 비치를 감상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임용공부 시작한 후로 8년간 얼어붙었던 시가 비록 유치하지만 크리스천이 방언 터지듯(?) 쏟아지는 느낌이다.
모살 내부 홀 너머 보이는 주방과 이곳 사운드를 책임지는 하만카돈 진공관형 스피커...(진짜 집에다 들여놓고 싶을 정도다...)
협재에서 나의 9월달 보금자리는 쫄깃이었고, 11월에는 플래닛이었다.
이번에는 무려 6일 연속을 협재게스트하우스에서 묵기로 일찍부터 결정하고 미리 입금 완료. 앞의 두 곳보다 가격도 저렴한 것이 일주일 여행자로서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협재의 다른 곳보다 왠지 눈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는 듯한 캐주얼한 분위기라는 느낌이 협재게하 네이버 카페에서 느낀 부분이었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일주일 내내 게하에서 여는 치맥파티를 한번도 안 간 것이(모살에서 노느라 못 간 거라고 해야겠지;;;)
성격좋고 털털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들에게 미안할 뿐...
만으로 서른, 이 밤이 지나면 나이 서른 둘...
창문 너머로 협재 해변이 넘쳐 흐른다. 눈 뜨면 여기서 마실 나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황홀했다.
아침은 아침대로 하늘빛 쪽빛 에메랄드빛이 넘쳐 흐르고, 저녁에는 금능쪽으로 해가 금빛으로 넘어가는데,
그래 어쩌면 나는 제주보다는 협재를, 협재 일몰과 협재 아침바다를 또 보기 위해서 여기로 온거라는 느낌...